신지애의 손은 작고 못생겼다. 손바닥 곳곳엔 굳은살이 박혀 있다. 손가락 마디는 울퉁불퉁하다. 손과 손목 힘을 기르기 위해 신지애는 아령과 완력기를 하루에 400번 반복했다. 매일 100번씩 타이어도 때렸다. 야구방망이가 부러져 나가도 치고 또 쳤다.
156㎝로 키가 작은 신지애의 다리는 굵다. 신지애의 '무쇠다리'는 계단 오르기로 단련됐다. 신지애는 연습장 앞 20층 아파트를 매일 뛰어서 오르내렸다. 조금씩 횟수를 늘려가며 하루에 7번을 반복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골프를 하기엔 손이 너무 작다고. 선수가 되려면 키가 더 커야 한다고. 그러나 신지애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았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했다. 신지애가 매달린 것은 오로지 연습이었다. 드라이버샷 연습을 하루에 1000회 이상 반복했고 퍼팅 연습을 7시간 동안 내리 했다.
타고난 운동신경은 있었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많은 기록을 세웠지만 세계 무대에서 '여제'란 타이틀을 달기엔 아직 이르다. 천재로 태어나지도 못했고 여제로 우뚝 선 것도 아니지만 신지애가 걸어온 길은 희망을 향한다.
눈물을 삼켰기에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활짝 웃는 신지애의 미소는 더 환하게 빛난다. 비거리 270야드에 이르는 호쾌한 드라이버샷과 홀 바로 옆에 꽂히는 정교한 아이언샷은 혹독한 연습의 산물이다. 그러나 신지애의 전매특허로 인정받은 과감한 퍼트는 충만한 자신감이 낳은 정신의 산물.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웠을 시련이 자신감을 단련시켰다.
불행엔 예고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한 골프에 신지애가 쏠쏠한 재미를 느껴갈 무렵인 2003년, 두 동생과 함께 목포로 가던 어머니의 차를 25t 트럭이 덮쳤다. 이 사고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당시 겨우 중학교 3학년이었던 신지애는 어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마냥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여동생과 남동생은 병실에 누워 있었다. 처음 자신을 골프연습장으로 이끌었던 아버지의 믿음은 여전했다. 연습으로 지칠 때면 투정을 부릴 수 있는 어머니는 곁에 없지만, 이제 두 동생에겐 언니이자 누나인 자신이 곧 어머니였다.
그 후로 1년이 넘게 병실 간이침대가 신지애의 잠자리가 됐다. 골프장과 학교를 오가며 동생들을 간호했다. "하루 연습을 안 하면 자신이 알고, 이틀 연습을 안 하면 주위가 알고, 사흘 연습을 안 하면 모두가 안다고 하잖아요. 힘들 때일수록 연습에만 매달렸습니다. 오직 볼을 치기 위해 집중하다보면 힘든 생각이나 쓸데없는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어지거든요."
신지애는 어머니를 잃은 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 골프채를 잡은 이후 지방대회에서는 수십번 우승컵을 거머쥐었지만 전국대회에선 중학교 2학년 때 3위, 3학년 때 2위를 한 것이 전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국가대표로 선발됐지만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합숙소를 나왔다. 멀리 있는 명예보다는 눈 앞의 돈이 먼저였다. 가족에 힘이 되어야 했다. 동생들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싶었다. 이런 바람은 신지애를 연습으로 이끌었고 연습은 배신을 몰랐다. 손엔 굳은살이 박히고 허벅지가 두꺼워져갈수록 신지애가 꿈꾸는 미래는 더 또렷해졌다.
그리고 프로 데뷔 첫 해인 2006년 시즌 3승으로 다승왕, 상금왕, 신인왕, 최저타수상, 대상에 이르기까지 5관왕을 휩쓸었다. 2007년엔 우승과 상금 관련 국내 최연소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25년 묵은 KLPGA 시즌 최다승(5승) 기록을 넘어 9승을 올렸고, 시즌상금 6억원을 돌파했다.
지난해엔 LPGA투어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을 비롯해 미즈노클래식과 우승상금 100만달러가 걸린 ADT챔피언십까지 석권하며 LPGA투어 비회원 사상 첫 3승을 거뒀다. 덕분에 한국, 미국, 일본, 유럽투어에서 모두 퀄리파잉스쿨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투어에 직행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모두 비회원 신분으로 대회에 나가 우승을 거두면서 자동출전권을 따낸 것이다.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국내 대회에서 7승을 포함해 올해만 11승을 올렸다. 3년 연속 상금왕에 국내무대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상금 7억원도 넘어섰다.
막대한 상금을 받는 만큼 나눔에도 아낌이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동생들과 시작한 단칸 셋방 생활은 신지애로 하여금 주변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게 했다. 비슷한 고통을 겪어봤기에 그들이 얼마나 절실한 상황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용돈을 받아서 쓰면서도 받은 상금을 기부로 내놓는 데 인색하지 않은 이유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저도 힘든 시절을 겪었습니다. 당시에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제는 제가 그분들의 사랑에 대해 보답할 때라고 생각해요."
신지애는 데뷔 초부터 매년 수천만원씩 불우청소년 장학금이나 불우이웃돕기 등에 성금을 내왔다. 지난해 9월엔 경기 용인의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2400만원어치의 쌀과 지원금을 건네며 "금액이 많지 않아서 죄송하다"고 했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도 지원금을 내놨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되면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아버지가 다니는 교회의 헌금, 동네 봉사 등 연간 기부금까지 포함해 매년 억대의 기부를 실천해오고 있다.
앞으로 최경주의 '자선재단'처럼 재단을 만들 계획도 있다. "기부는 결국 작은 관심과 실천이잖아요. 막연하게나마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참고해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재단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지금은 선수로서의 생활을 충실히 한 후 앞으로 시간을 갖고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올해 신지애는 스물이란 나이에 한 살을 더 올려놓는다. LPGA에서 새로운 골프인생, 다시 1부터 시작이다. 고난을 겪어봤기에 신지애는 두려움이 없다. 슬픔을 알기에 과거에 연연하며 뒤돌아보지 않는다.
경기에 임해서도 아무리 한두 타 차로 쫓기는 절박한 상황이라도 신지애의 표정엔 변함이 없다. 이번 샷 이후엔 다음 샷, 이번 홀 이후엔 다음 홀, 이번 라운드 이후엔 다음 라운드가 있을 뿐이다. 이미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지 않고 반복하지도 않는다. 늘 다음을 준비할 뿐이다. 웃는 모습이 귀여운 신지애가 필드의 포커페이스란 별명을 얻은 이유다.
신지애는 선두와 5타 차 이상 벌어져 있어도 중압감 대신 자신감으로 스윙을 한다. 경쟁자를 의식하기보다는 끝까지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덕분에 후반전 역전 우승이 많아 '파이널 퀸'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세계 무대로 발을 내딛는 신지애의 포부는 크다.
"우선 정식으로 하는 LPGA 첫 도전인 만큼 신인왕을 노리고 있습니다. 평생에 한 번 있는 타이틀이니 놓칠 수 없잖아요. 세계 무대는 넓고 좋은 선수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 분발해서 선의의 경쟁을 펼쳐 보일 겁니다."
올해 세계 골프계의 이목은 작은 한국인 선수에게 쏠려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박세리 이후 최고의 선수'라고 신지애를 평했고, 골프전문잡지 골프위크는 '한국의 가장 빛나는 스타가 내년 LPGA 무대 데뷔를 앞두고 있다'며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예 '신지애는 로레나 오초아와 폴라 크리머에 대적할 강력한 선수로, 올해 신인왕이 거의 확실하다'고 전망했다.
매년 성장해 왔지만 신지애는 오늘도 한 발 앞서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 "골프선수로서 세계 랭킹 1위와 명예의 전당 입성도 제 목표예요. 그러나 무엇보다 존경받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ADT챔피언십 때 소렌스탐을 보면서 존경받는 선수란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가족에게도 충실한 줄리 잉스터처럼 인자한 인상으로도 남고 싶어요. 많은 사람에게 베풀면서 주위의 고마운 분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고 싶거든요. 뛰어난 골퍼이자 '인간 신지애'로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는 것이 제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출처: http://golf.media.daum.net/news/all/view.html?cateid=100000&newsid=20090102092707439&cp=ned&RIGHT_SPORTS=R5